77일째 (7월 2일 )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에서

공항 벤치에서 청소부들(한밤중 내내 청소)의 눈치를 보면서 앉았다 누웠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5시 정도 활동시작.
공항 화장실에서 원래 하던 데로 면도, 이 닦고, 세수하고 난후 탑승수속을 마치다.
출국 대기 장 안으로 들어가 면세점등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시티카드 라운지가 있어 평소에 발급 받고 한 번도 이용해 본적이 없어 실험 삼아 들어가 보니, 말 그대로 흉내만 내는 정도의서비스, 커피와 맛없는 샌드위치 얻어먹고 비행기에 탑승하다.
비행기 안은 페루 리마 쪽으로 가는 승객들 수에 비해 인원이 눈에 띄게 적어 좌석의 절반도 채우지 못 할 만큼 한산하다.(리마 쪽은 훨씬 더 많은 항공편과 승객들로 북적)
어찌 됐든 비행기는 바다에서 황량한 달기지에 착륙하는 것처럼 이상하고 메마른 어디 한군데를 거쳐 3시간 정도 흐른 후 라파스 엘 알로 국제공항에 도착하다.(해발 3650m에 위치)
라파스의 공항의 첫 인상은 한 나라 수도의 공항이라기엔 규모나 시설이 너무 작고 초라해 마치 아프리카 소도시 공항 정도 규모, 마치 기차역을 연상 시킨다.
입국 수속. 은근히 비자 때문에 마음이 좀 걸리고 다른 승객은 패스포트에 도장 찍기 바쁘게 일사천리로 넘어가는데 드디어 내 차례, 볼리비아의 비자 문제에 대해 확실할 만한 정보도 갖지 못한 상태 (비자 통과는 문제가 없을 것이란 짐작만)에서 약간 걱정스런 마음으로 여권을 건네고 비자 발급을 요청하니 출입국 직원, 한참 이것저것을 찾아보고 국적도 확인해 보고 다른 사람들과 상의도 해 가면서 시간을 끄는 사이 나는 조마조마한 상태로 기다리고만 있고 한참 후에 거기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이 같이 와 비자 발급 가능하다고 하면서 처음에는 비자피로 40달러를 말하더니 공항 오피스에 들어가 다시 확인 하더니 또 50 달러로 말하고, 나도 그때부터는 여유가 생겨 달러 현금 가진 게 42달러라고 말해 깎아서 낙찰, 비자 받고 겨우 입국하다.
말이 공항이지 쓴 웃음이 나올 만큼 엉성하다.
평소 한국인 입국자가 거의 없는 모양, 한산한 출국장을 빠져나와 수화물 보관소에 짐을 찾는데 너무 오래 지체 했는지 짐이 보이지 않는다.
가슴이 덜컹, 다시 공항 사무실로 가 직원과 함께 짐을 항공사 카운터에서 찾아내고 공항 안에 있는 관광 안내소에서 호텔, 여행사, 레스토랑, 라파스 중심가, 정보 및 지도를 장시간 동안 전수 받고 비행시간마저 확인(쿠스코→리마) 하려 했으나, 페루 지역은 여기서 확인 할 수 없다는 대답과 함께 공항을 나오니 히말라야 고원에 있는 것처럼 세계 최고 높은 지대 수도답게 일리마니 산 6400m주위를 병풍처럼 5000m 가 넘는 고봉들이 만년설을 치장 한 채 둘러 서 있는 모습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택시 잡는 것은 둘째, 이곳저곳 사진 찍기 바쁘고 한적한 공항에 대기 하는 택시 2대, 승객도 직원도 거의 보이지 않고 택시 직원에게 여행 안내소에서 소개 해준 별 2개짜리 그 호텔로 갈 수 있냐고 하니, 그런다 해서 우리나라 돈으로 5000원 정도 주고 시내 호텔 까지 차를 타고 가는데 산언덕의 집이 그전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보았던 여수의 달동네처럼 산의 경사를 그대로 이용하여 황토색 지붕들을 이고, 한없이, 끝없이 산을 뒤덮고 있는 풍경이 참으로 이색적이고 정감이 든다.
가는 중간 택시기사에게 잠시 쉬어가자 말하니 구레나룻에 약간 험상 굳게 생긴, 그러나 맘씨 좋은 아저씨는 선선히 따르고 거기서 시내정경을 구경하고 잠시 머물다.
이윽고 호텔에 도착, 허름한 지방 여관 정도. 숙박비 물으니 우리 돈으로 3000원짜리, 8000원 짜리 방이 있다고 해서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했으나 원래 그런 가격.
일단 방을 보고 8000원 짜리 선택해 방에 들다.
도시가 해발 3000m 정도 고원에 있기 때문에 밤으로 갈수로 점점 쌀쌀 해 지는데 난방은 꿈도 못 꾸고 뜨거운 물도 겨우 나오는 수준인데 어쨌든 별다른 정보 없이 와서 숙소 문제를 일단 해결하니 마음은 느긋하다.
간단히 샤워하고 시내 관광에 나서다.
군인들이 무지 많이 돌아다니는 게 은근히 안심이 되다.
산프란시스코 사원 쪽에서 시내를 원래 하던 대로 쭉 길게 걸어서 돌다.
시장기가 돌아 사가트나가 거리를 따라 여행 안내소에서 소개해준 식당을 물어물어 찾았으나 문이 닫혀져,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 고봉이 위풍당당하게 시야에 들어오고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사잇길로 들어가 한참 가는데도 나무와 빌딩에 막혀 완전한 모습을 보는 데는 실패하고 그 근처에서 우연히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큼지막한 소시지를 섞어서 바비큐 하는 식당이 있어 그렇지 않아도 이스터 섬에서부터 고기 구경 제대로 못한 판에 눈이 번쩍 뜨인다.
무작정 들어가니 관광객이 생소한 듯 그쪽에서 이목집중, 더 신기해하고, 메뉴판 봐서는 뭐가 뭔지 모르고 밖에 나가 바비큐 하는 고기들을 일일이 손으로 가리키며, 소고기, 돼지고기, 소시지 다 섞어서 가져오라 손짓 몸짓 하니 알아듣는 모양이다.
음료수로 맥주를 시키는데 거의 의사소통이 되지 않고 또다시 일어나 맥주를 찾아보니 보이지 않아 이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참에 주인이 병에 든 흑색음료를 가져온 걸 보니 마침 흑맥주라, 시켜 한잔 먹으니 전번 더블린에서 먹었던 기네스 것보다 맛이 달고 먹기가 편하다.
조금 있으니까 비프스테이크, 돼지, 햄 소시지를 듬뿍 담고 접시에단 밥을 담아, 엄청 많은 양을 갖다 준다.
약간 짠맛이 있었으나 나중에 돼지 껍데기만 한 점 남기고 다 먹어치우다.
주위 사람들도 고기를 산처럼 쌓아놓고 먹고 있어 이 민족이 고기를 좋아하고 대식가구나 생각이 들다.
다 먹고 계산을 하려하니 우리 돈으로 4000원. 다시 한 번 그 싼 가격에 놀라고, 오랜만에 값싸고 포만감을 느낄 정도로 먹으니 마음이 느긋하고 흡족해 진다.
숙소로 돌아오는 중에 땅콩 발견, 200원 정도에 한 무더기 주는데 땅콩 껍질이 우리나라 것보다 황토색을 띠며 좀 작다. 여기는 나라 전체가 황토색이다.
사람들 생김새가 남미계라기보다 아시아 몽고계와 비슷해 우리나라 사람들과 모습이 많이 닮았다.
청춘 남녀들이 거리에서 껴안고 뽀뽀하고 나라는 못 살아도 애정 표현에 대한 자유는 우리나라 보다 훨씬 더 발전한 모양이다.
군복 입은 남녀들, 무장하지 않은 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이 나라도 군부의 영향력이 크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데 위협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치안을 생각하니 안심이 들다.
숙소에 들어와 입구에 있는 여행사에 들러 내일 푸노 행 버스에 대해 문의하다.
대개는 7시 30분에서 8시 사이에 딱 한번 출발하기 때문에 시간에 맞춰 잘 출발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사람들 옷을 두껍게 입고 우중충 하며 손이나 얼굴에 별로 목욕한 흔적이 보이질 않는다.
우리의 70년대 겨울철, 시골 모습이 연상된다.
라파스-코파카파나-푸노, 거기에 생각지도 않게 당일 쿠스코로 가는 심야 버스로 연결되고 이렇게 되면 일정이 한 치의 틈도 없이 빡빡 하지만 6일 리마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행은 또 달리 비행일자 연기 없이 그대로 가는 게 가능해지고, 쿠스코, 마츄피츄, 또 그다음 일정에도 전반적으로 여유가 생긴다.
생각지도 않게 새로운 일정을 발굴하고 이왕 한 김에 쿠스코에서의 마츄피츄 일정, 거기다 쿠스코에서 리마로 가는 교통편 까지 여기 볼리비아 허름한 여행사에서 한 번에 해결을 보려는 과욕을 부리게 되자 또 모든 것이 복잡해지고 뒤엉켜 버린다.
마츄피츄 일정이 끝나고 쿠스코에서 리마까지 비행기 대신에 심야 버스(20시간)를 이용하는 일정에 합의, ATM에 들러 돈을 찾으러 나왔다가 뭔가 석연치 않고 결국 여행자 수표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핑계로 지금까지 것은 없던 걸로 하고 내방에 돌아오니(푸노행 버스표만 구입) 몹시 피곤, 2시간 넘게 이리저리 머리를 쥐어짜며 최선을 찾으려 하다 보니 몸도 마음도 지치고, 기분도 언짢아지고 그대로 씻지도 않고 윙윙거리는 귀속 소음과 입에서 하얀 김이 나오는 냉방에 쓰러지듯 잠에 빠져 들다.

간단명료함. 대범함, 어떻게 보면 쉽게 간과하지만 결코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원칙.
여행 일정을 짜는 것, 오늘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차원에서 너무 서둘러 멀리까지 가다보니 필요이상의 정신적 소모.
그러나 그것이 지금 불만족스러움을 주었을 지라도 결국 나에게는 최선이었고 하나의 경험을 축척하는 계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