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푸르나가 마음을 열다.

5시에 기상, 찬물로 샤워하고 선체조시작하다.
어젯밤은 비교적 숙면을 취하고 근육통이 있으나 견딜만하다.
베드 두 개를 붙여 선 체조를 오랜만에 공들여 하고, 호흡을 깊게, 경직된 근육을 풀어주고 명상을 통해
혼자만의 평화스런 시간을 갖으며 내 딸 영욱, 영서 편지를 읽다보니 마음이 복받쳐 눈물이 나려한다.
민지가 노크, 방값 계산에 어제 캠프파이어 비용을 합해 40불 지불하고 짐을 꾸려 8시정도 출발하다.
(아침은 총무의 상한 식빵에 잼을 발라 커피두잔 으로 때우다).
다행히 어제 혼자 내려갔던 계곡 쪽 급경사 길이 아니고 상 중턱을 따라 완만하게 나 있는 길을 따라가다.
전반적인 의견이 오늘은 최대한 천천히 트레킹을 하자고 해 선두 대건에게 주지시키고, 길을 벗어나
계곡 쪽을 향해 산기슭에 나있는 논두렁 밭두렁을 그냥 건너기도 하고 뛰어내리기도 하며 걷는 것을
재미있게 즐기며 계속 GO 한다.
어제에 비해 조용한 분위기에서 트레킹이 진행되고 알이 배긴 장딴지에 물을 계속 축이면서 가다.
포터, 대건, 나, 민지, 은수로 1진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2시간 정도 가서 휴식하다.
봉지에 땅콩이 조금 남아있어 콩 한쪽도 나눈다는 마음으로 민지, 은수에게 몇 알씩 주니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땅콩이라며 맛있게 먹는다.
포터 둘과 넓적하게 생긴 호빵 같은 것에 꿀을 찍어먹으며 그들의 꿈과 일상사에 대해 얘기하다.
10시 조금 넘어 다시 출발. 목적지는 핫 스프링이 있는 지누다라.
출발은 같이 했으나 1진이 또 자연스럽게 형성. 생각 외로 은수가 잘 따라온다.
대건이 오히려 포터를 앞서 향도로 나서고 나는 포터 쪽에 합류한다.
민지 쪽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갈림길에서<→민지, 연수> 나뭇가지로 길바닥에 방향을 표시해놓고
계곡에 도착해 씻고 있는데 민지가 도착해 그 일에 대해 치하해주다.
계곡에서 조금 쉬다 2진 도착하자 1진은 바로 출발.
계속 가파른 오르막길이 이어지고 12시 정도 지누다라에 도착하다.
여기서 25분 거리에 Hot spring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이왕 온 김에 희망자에 한해 우리 일행을
두 팀으로 나눠 각자 한명씩 포터를 데리고 온천 팀, 그냥 트레킹 하는 팀으로 나누자 제의했으나
포터가 온천까지 갔다가 다시 츄무롱까지 가는 것은 여자에게 너무 무리라고 해 Hot spring은 아쉽지만
포기하고 그냥 츄무롱을 향해 출발하다.
거기서 츄무롱까지는 내리막길 없이 급경사에 오르막길이 계속 이어지고 이제야 드디어 크라이밍 같은
기분이 나는데 포터와 대건인 멀찍이 먼저 올려 보내고 민지, 연수와 쉬엄쉬엄 가면서 쉴 때마다 몇 분씩
눈을 감고 명상을 하고 그렇게 2시간쯤 가니 오늘 최종 목적지인 츄무롱에 도착한다.
생각보다 훨씬 빨리 이른 시각에 도착하다보니 이럴 줄 알았으면 Hot spring을 들렸다 와도 충분하지
않았냐는 뜻으로 포터에게 항의를 표하고 포터말도 일리는 있어 더 거론하지 않고 성큼 산장에 혼자 올라
제일 먼저 방 잡고(203호) 목욕탕에서 따뜻한 물이 나와 온천욕 못간 것 보상하듯 충분히 목욕하고
어제 저녁 치킨 파티에서 남은 고기와 감자(놀랄 정도로 큰 장 닭 두 마리 잡아 어제 절반도 못 먹고
나머지는 포장해서 가져왔음)를 주방에 말해 치킨 커리 만들어 달라고 하면서 80루피 주니까 얼마 안 있어
진짜 멋진 별미요리, 일행들과 아주 맛있게, 그리고 충분히 많이 먹고(내가 절반은 먹은 것 같음)
내방으로 들어와 1~2시간 죽은 듯이 잠을 자다.
깨어보니 4시 30분쯤. 경험상 더 이상 자면 안 좋다는 것을 알고 다시 내려가 샤워를 풍성히 한번 더하고
빨간 반팔에 얇은 긴 등산 바지에 모자, 배낭을 가볍게 메고 숙소를 나오다.
숙소는 1950m 산 중턱쯤에 위치해 있고 산 위쪽으로 돌 계단식으로 길이 나있고 여기저기 지천으로 깔려있는
소똥들을 피해가며 얼마간 오르니 멋진 장관들이 펼쳐진다.
산들이 굽이굽이 끝없이 겹쳐지고, 저 멀리 만년설을 가득 담은 안나푸르나가 구름에 가려 일부 자태를 보여준다.
주변 경치를 음미하며 빛 명상을 하며 한걸음, 한걸음씩 걸어 올라가며 안나푸르나를 가리고 있는
구름들이 다 걷혀 온전한 그 자태를 내게 나타내주길 간절히 기원하다.
10분 정도 위로 올라가니 농가가 한 채 보이고 커다란 물소 한 마리가 새끼 한 마리와 풀을 뜯어먹고 있는데
농가 쪽으로 가기위해 그 앞을 지나려니 나를 바라보는 물소의 당당하고 위압적인 풍채나 뿔이 예사롭지 않아
차마 길을 가로지르지 못하고 산벼랑 쪽에 나 있는 축대 쪽으로 가 앉으니 소가 나 있는 쪽으로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데 순간 놀라고 당황스러워 만약의 경우 축대 아래로 뛰어내릴 것도 계산에 넣고 생각을 하다 보니
은근히 그러는 내가 조금 우스운 생각이 들고 그것이 곰 같은 맹수도 아닌데 그리 두려워 한다는 게 자존심도
상해, 다가오는 소를 모른 척 무심하게 다른 곳을 바라보고 가만히 있으니 나있는 거의 지척까지 다가온다.
최대한 완만하게 지긋하게, 그 소의 왕방울만한 눈에 내 눈을 맞추고 한 호흡정도 지난 후 손으로 빨래판만한
콧잔등을 살짝 쓰다듬어주니 그 하마 같은 입으로 혀로 내 손, 바지, 배낭 할 것 없이 침을 듬뿍 묻히면서
잼을 바르는데 이러다 꽉 무는 게 아닌 가 순간 경계가 됐지만 네가 그래봤자 소다, 대범하게 맘을 먹고
심드렁하게 대하니 어슬렁거리며 자기 새끼에게 다시 돌아가 풀을 뜯고, 소는 그렇게 자기 할 일 하고
나는 소가 마련해준 축대 자리에 앉아 안나푸르나를 보니 과연 이 자리가 명당이라.
저 멀리 안나푸르나가 만년설을 이고 우뚝 솟아 있고 그 아래 산맥들이 열병하듯이 겹겹이 펼쳐지고,
아까 나의 기원을 들어주기라 한 듯 안나를 싸고 있던 그 구름들이 다 걷혀지고 마치 나를 환영하듯이
그 장엄한 자태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저녁 어스름, 여명 속에 축대 넓적한 바위위에 정좌하고 앉아, 안나를 향해 염원을 하다.
나의 세포 하나하나, 구멍 하나하나 모두 다 열어놓았으니 내 심신을 정화시켜 온전해지고 나를 새롭게 하여
보다 강건하고 겸허하고 넓게 포용할 수 있는 큰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원하며 빛 명상을 하다.
갑자기 안나와 그 및 산 봉오리 밑으로 큰 구름이 하나 지나가는데 무언가 마음이 예사롭지 않다(사진).
명상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서니 어느새 어둠이 밀려오고 맑게 자태를 드러냈던 안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안개와 구름으로 혼란스럽게 뒤덮여버리고, 안나는 자기 몸을 활짝 열어 보임으로써 나를 환영해주고,
나는 어둠에 고원의 산길을 조그마한 손전등 하나 의지해 겨우겨우 숙소를 찾아 돌아오다.
일행들은 숙소 마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고 민지가 걱정을 좀 한 듯 반겨서 나를 맞는다.
굳이 식사 생각이 없는데 민지, 컵라면을 하나 끓여줘 먹고 guest H 식당 의자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조금 나누고 올라와 씻고 일기를 쓴다.

지금시각 저녁 10시 52분, 츄무롱 산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