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24(5월 10일 수) 안나와 아쉬운 이별

5시 기상. 물 얻어 화장실에서 간단히 세면하다.
식당에 가서 커피 한잔시키고 음식추천 받아 빵 넓적한 데 계란지단을 얹은 것 시키고(5시 30분)
포터와 밖으로 나와 주변에 펼쳐져있는 히말라야 산봉우리들 이름을 물어보다.
안나푸르나 사우스, 싱카푸르, 텐픽, 마챠푸츠레... 7천에서 8천 미터 급 거봉들 이름 하나씩 알아내 불러보고,
지금은 운 좋게 쾌청하나 언제 산 아래 쪽에서 구름이 몰려나올 줄 몰라 마음이 상당히 조급하다.
식당에 주문한 음식을 그냥 싸주라 하고 부랴부랴 산등성이 위로 올라간다.
밑은 천길 낭떨어지. 그러나 너무나 맑고 쾌청한 날씨. 나에게 허락된 시간은 딱 한 시간.
어쨌든 안나가 나를 거부하지는 않고 어쩌면 나를 상당히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부랴부랴 각 명칭의 히말라야 산봉우리를 사진에 담기 여념이 없고 그런데 나를 찍어줄 사람이 없어 아쉬운 판에
대건이 올라오는 것이 보여 반가운 마음으로 안나와 여러 산봉우리를 배경으로 몇 장 찍고 완전한 일출 후 얼굴에 음영 없이
또 몇 장 다시 찍고, 그리고 산등성이를 따라 쭉 걸어서 갈 수 있는 곳까지 둘러보다가 출발 예정시간 7시10분 전에
ABC캠프로 돌아오다.
식당에서 싸 준 것과 라면 비슷한 걸로 맛있게 아침을 먹고 곧 출발하다.
베이스캠프를 나와 아직도 환하게 웃고 있는 안나를 배경으로 민지와 사진 몇 장 찍고 내려오는데 뭔가 마음이 섭섭하고 허전하다.
안나와 작별인사도 없이 그냥 온 것이 마음에 걸린다.
포터에게 잠시 여기 있다 따라간다 말하고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가 안나가 잘 보이는 곳에서니 south는 절반 정도,
안나푸르나1,2가 앞산에 1/3 정도 가려 있지만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너무도 환하게 웃음 짓는 안나.
계속 멍하니 발을 떼지 못하고 사랑하는 연인이나 누이와 작별하는 것 같은, 오래 전부터 알아온 것 같은, 뭔가 알듯 말듯
미묘한 감정을 추스르고 안나에게서 발을 돌리다. 그때 안나가 나에게 속삭인다.
[잘가요 오라버니] 나는 대답한다. [내가 언젠가 무에 가깝게 죽어지면 그때 꼭 너에게 다시 오마]
다시 트레킹 시작. 가장 뒤에 쳐져 아직도 남아 있는 안나에 대한 향기와 파장을 느끼며 꽃과 계곡의 만년설을 음미하며
히말라야의 아름다움을 사진에 담으며 일행과는 한참 떨어져 여유있게 혼자 가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가는 길에 비해 훨씬 빠르게 트레킹이 진행되어 게스트하우스를 하나하나 지나치고 영어 공부와 트레킹에
집중하기위해 나는 일행과 일정한 거리로 떨어져서가고 대건이 내가 너무 늦은 것이 걱정되는 모양, 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바로 앞에서 나를 챙기면서 간다는 느낌이 든다.
세스 영어회화를 들으면서 마치 일행을 뒤에서 추적하는 사람처럼 유유자적 가다보니 1시쯤 되고 산장에서 민지, 은수에게 알아서 주문하라하고 나는 식당 안에 들어가 잠시 수면. 깨어 보니 계란 프라이, 볶음밥, 유니온 수프..
몇 가지 집어 먹고 오후 트레킹을 시작하다.
여기서 시누아까지 중간 지점이 45분, 시누아까지 거기서 1시간 30분 정도 더 걸리고 시작은 오전과 같이 천천히 그러다
작전을 바꾸어 시누아가는 길부터는 혼자 치고 나오다.
한참 열심히 갔나했더니 대건이 총무, 민지, 연수 다 따라오고 짐짓 놀라와 [어느새 몇일 만에 이들이 트레킹 도사가 됐구나.]
란 생각이 들다.
대건이 내가 쉬는 틈을 타서 앞으로 나오고, 그 다음부터 앞서거니 뒤서거니 거의 뛰다시피 가는데 시누아 중간지점에서
먼저 질러간 포터를 만나다.
잠시 쉬다 포터를 앞질러 시누아로 출발. 포터가 열심히 따라오고 은근히 장난기가 동해 시누아까지 마치 달리기 경쟁하듯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 먼저 도착해 얼굴만 씻고 의자에 앉아 앞에 넓게 펼쳐져 툭 트인 산을 바라보며 지긋하게
눈을 감고 새소리 물소리 들으며 잠시 명상하다.
일행 오기를 기다리는 포터에게 먼저 출발한다고 말을 하고 시누아를 떠나 츄무롱 향해 출발하다.
시간은 오후 4시쯤 되고 앞으로 츄무롱 까지는 1시간 반 정도 예상. 은수, 민지 어느새 따라오고 조금 가다 보니 포터도
바삐 따라온다.
포터에게 길을 양보하고 발 가운데 물집이 생겼는지 아파 잠시 쉬는데 은수가 내 앞을 지나가고
(은수에게 내리막길에선 오히려 빨리 걷는 게 유리하다고 말해 줬는데 그 다음부터는 그 가냘픈 체구에 마치 발에 발동기를
단 것처럼 종종걸음으로 너무 빨리 걷는다) 그 다음 민지 오는 것을 기다려 같이 가다.
아름답고 맑고 향기로운 이 산에, 자연과 우주에서 오는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는 그 길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 길을 서둘지 않고 한가로이 모든 것을 만끽 하며, 좋은 파장, 좋은 기운, 좋은 공기 듬뿍 적시며 천천히 가다.
오전 트레킹 중 밀림에서 느꼈던 음습하고 칙칙한 기운들을 모두 날려 보내다.
츄무롱에 도착하니 6시 30분. 양말, 내의 등을 간단히 빨래하고 전 선생이 양보하여 먼저 씻고 민지 컵라면 뺏어먹고
내방으로와 디카 사진정리하다 식당에 다시 내려가 맥주에 스테이크 치킨 먹으며 민지, 은수와 이런 저런 얘기, 내 집사람
지운이 얘기 (대단한 여자. 살수록 점점 마음이 끌린다고 함), 대학 시절 풋내 나는 로맨스...이야기하고 내방으로 올라가
침낭 속에 몸을 누이고 깊은 잠에 빠져 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