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일째 (7월 1일) 이스터 섬을 빠져 나오다.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방도 구석지에 끝 방으로 창문 열고 빗소리 들으면서 창밖 야자수를 바라보며 자의반 타의반 모처럼 일 없이 의도적으로 퍼져, 책 보면서 뒹굴뒹굴 깼다 잤다 하기를 반복하다.
새벽에는 몹시 쌀쌀해 추리닝 끼어 입고 다시 자다.
오늘 새벽 5시 30분 드디어 일어나 찬물로 샤워하고(주인아줌마가 보일러를 틀어야만 뜨거운 물 나옴) 방안이 몹시 혼잡하여 이것저것 버릴 건 버리고 챙길 건 챙기고, 정리하는 김에 남미에 관한 자료와 정보도 더 채집하다 보니 시간이 후딱 가 버린다.
결국 오늘도 선 체조 할 시간이 빠듯해 하지 못하고 9시 정도 짐을 꾸려 숙소를 나오다.(선 체조는 밥을 안 먹더라도 하루에 한번)
오늘 일이 잘 풀려야 할 텐데, 뭔가 미심쩍고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별 탈 없이 산티아고~리마 간 비행기 예약이 잘 되겠지 하면서도 뭔가 감이 좋지 않아 마을에 있는 란 칠레 여행사에 가보니 문이 닫혀져있고 전화를 하기위해 간 인터넷 전화방도 마찬가지다.
곧 바로 공항 쪽으로 택시 타지 않고 걷다보니 20분 정도 걸려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 체크인 하기 전에 카운터에다 내 이름으로 산티아고~리마 비행기 예약을 확인하니 예약이 안 된 걸로 나오고 그러면 국내 여행사에서 예약을 못 했다는 말인데, 일단 탑승 수속하고 시간이 1시 30분 정도 남아, 다시 마을로 걸어 나와 전화방에서 집에 확인해 보니 이러 저러한 이유로 예약을 못했다고 한다.
다음 일정에 불확실성 때문에 기분이 조금 저조 해지고 어쨌든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
이제는 산티아고에 가서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겠고 공항 쪽으로 가기 위해 마을을 지나다가 가게에 들려 빵 하나 사서 맛있게 먹다.
연 3일 가까이 빵을 주식으로 식사를 해결하고 그런 중에 어제 저녁 산 빵은 최악, 그래도 슬라이스 햄에다 거의 다 먹고 오늘 아침 하나 남긴 것도 다 먹어치우다.
공항에 도착, 아직도 시간이 좀 남아 있어 공항 울타리 안 큰 나무 둥치에 올라가, 쉬면서 여행 영어 잠시 보다가 시간 되어 출국 대합실에 들어가니 오늘 따라 비행기가 40분 넘게 연착이 되어 만약 전번 떠나는 날 이정도 연착이 됐으면 그날 이 섬을 빠져나가 황금 같이 귀한 이틀간의 시간을 예정에 없이 써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순간적으로 약간 울적해지다.
조금 있으니 비행기가 도착하고, 어차피 그 비행기를 타고 산티아고로 다시 가야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승객들 내리는 것을 차분히 지켜보니 승객들이 대합실 안에 들어오자 픽업해 주기 위해 나온 호텔이나 민박집 사람들이 꽃목걸이를 걸어 주며 환영해 주는데 나도 숙소를 미리 예약하고 왔으면 꽃목걸이 환영을 받을 수 있었겠구나 생각하며 조금 기다리니 기내 정리가 끝난 모양인지 비행기에 탑승케 하고 이번에도 비즈니스 석 맨 앞자리에 앉고, 몸이 약간씩 나빠지는 조짐이 보여 기내식후 포도주를 2잔정도 먹고 쉬는데 오히려 컨디션이 급속도로 악화되다.
심기가 뭔지 모르게 좀 뒤틀려 있는데다 어제 잠을 무리하게 많이 잔 것이 독이 되어 리듬이 많이 깨져있는 것 같다.
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속은 멀미가 나는 듯 미식거리고 처음 이스터 섬으로 갈 때 승무원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품위 있고 행복 했던 모습과는 딴 판으로 완전히 망가진 모습으로 갈 때 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흘러, 겨우 잠 몇 번 자고 저녁 8시 쯤 되니 산티아고에 도착하다.
유럽 일정이 늘어나는 바람에 남미 일정이 너무 빡빡해져 버렸다.
그런다 해서 내 욕심에 가기로 마음먹은 데를 안 갈 수는 더욱 없다.
자, 지금부터 정신 바짝 차리고 최대한 치밀하게 짜임새 있는 여행 스케줄을 잡아야 한다.
우선 공항 출국장으로 올라가 아메리카 에어라인 카운터에다 10일 상파울로에서 마이아미로 떠나는 비행기를 12일로 연기해서 (대기자 명단에 올림) 남미 일정을 이틀 더 연장 시키고, 그 다음 란칠레 항공사로가 원 월드로 예약되어 있는 리마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가는 비행 일자를 4일에서 6일로 미뤄, 페루에서 체류 기간을 원래대로(이스터 섬에서 이틀 까먹은 것) 복원 시키다.
그 다음은 페루로 가는 비행기 편을 구하는 게 무엇보다 급선무.
일정이 빡빡한 관계로 여기서 바로 오늘밤 출발하는 것으로 마음을 먹고 각 항공사에 가격과 시간대를 문의하다.
란 페루항공에서 오늘 밤 자정 쯤 여기에서 리마로, 그 다음 쿠스코 까지 연계해서 가는 비행기 편이 58만원. 가격이 타 항공사에 비해 싸진 감이 있지만 아직도 썩 내키지 않고 여기저기 비행 루트를 연구하다 갑자기 볼리비아 라파스로 가 티티카카 호와 푸노를 버스로 횡단해 쿠스코로 가는 루트가 번쩍 내 머리를 스친다.
라파스 행 비행기 편을 알아보니 내일 아침 7시.
비용 350$ 비자는 거기 가서 공항에서 해결하면 될 것이고, 이걸로 결정해 티켓 끊고 공항 스낵바에서 맥주 한잔에 가볍게 요기하며 비박할 자리를 물색, 공항에서 하룻밤 보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