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푸르나를 생각나게 하는 융플라호

인위적인 것은 별 볼일이 없다.
4일 동안 걸어서 올라간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인공적으로 산에 철도를 놓고 구멍을 뚫어 올라가는 융플라호.
생각보다 별로이고 신기는 하나 감동은 없다.
나에게 그 푸른 하늘, 티 없이 깨끗하고 청명한 자태를 보여주었던 안나푸르나에 비하면 융플라호, 별것도 아닌 것이 감출 것을 감추지, 흐린 것도 아니고 희미하게 그리고 칙칙해서 선명치 않은 산 정상을, 사진에 담기가 영 망설여지는 그러한 모습들.
다른 사람들이야 감탄에 어쩔지 모르지만 나에게 있어 그다지 흥미를 끌어내지는 못하는 것 같고 네팔에서 맛보았던 신선함이나 벅찬 감동과는 거리가 한참 먼, 단지 기대만 크게 하지 않으면 산 좋고, 물 좋고, 경치 좋은, 평화스런 마을에 우뚝 선 멋진 산봉우리구나 하는 정도. 어쨌든 온몸을 다해 최선을 다하는 것, 오직 그것뿐.

일어나 보니 6시가 넘은 시간. 온몸이 찌뿌드드한 게 컨디션이 별로. 평소보다 늦잠(?)을 잔 나는 재빨리 짐정리하고 주인아줌마가 어제 저녁에 준비 해 논(오늘 아침 일찍 나간다니까 미리 준비) 아침식사를 맛있게 먹고 시내로 나와 산악철도가 출발하는 동역 쪽을 향해 걷다.
버스가 지나가기에 시간 절약 차원에서 버스를 잡아타고 동역에 도착해 라우터부루넨 쪽으로 올라가는 기차를 타고 창밖이 좋은 곳에 골라 앉아 느긋이 있는데 웬 일본인 관광객들이 우르르 몰려오더니 몹시 수선스러워지고 그냥 의연이 있는데 검침원이 와서 표 검사, 내 표를 보더니 2등 실로 자리를 옮기라 해 웬 산악철도에 일등실, 이등실. 자세히 표를 검사해보니 2class라 적혀져 배낭 둘러메고 약간 겸연쩍게 다음 칸으로 가다.
이미 다음 칸 좋은 자리(오른쪽)는 자리가 없고 아무데나 앉아 기차 안에서 비몽사몽하다.
좋은 경치가 나오면 형식적으로 카메라 들이밀어 몇 장 찍고 별로 흥취가 나지 않는다.
클라이네 샤이덱에서 융플라호로 가는 기차를 갈아타기에 이번에는 이등칸인지 잘 보고 재빠르게 올라 여행 책자에서 가르쳐준 오른쪽 좋은 자리를 확보하고 40분 정도 올라가는데 창밖 경치도 잠시 또 반 틈은 자고 반 틈은 졸면서 융플라호 전망대에 도착하다.
얼음궁전, 스핑크스 전망대..
물경 15만원상당의 거금을 주고 온 것이기에 본전은 뽑기 위해 진지한 마음으로 열심히 구경하고자 위아래 식당부터 맨 위쪽까지 몇 번 왕복 한 후 전망대 밖으로 나가서 눈썰매, 스키 타는 것 구경하는데 개썰매는 보이지 않고 천문대는 잠겨 있다.
팸플릿에 뭔가 대단한 것을 보여 줄 것 같이 광고했으나 지금까지는 영 아닌 것 같고 그래도 열심히 동분서주, 위아래 좌우를 빠른 걸음으로 휘젓고 다니다가 1시쯤 되어 융플라호에서 내려가는 기차를 시간에 거의 맞춰 타다.

* 융플라호에서 한 일
1. 생전 처음 애들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다.
평소에 안 해본일은 아무리 쉬운 일도 저항력이 크다.
2. 키세스 이지영 이사에게 전화해 파리 이후 일정에 대해 상의하다.
3. 전망대안 5F 주고 컵라면 먹다. 주인은 대단히 유쾌하고 활기 넘쳐 보이는 동양인.(저게 진짜일까, 오버일까)
4. 모두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행복에 대해 생각하다.
세상에 여기 온 사람 모두, 어쩌면 저렇게 행복해보일까.
원래 행복한 사람들일까,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만 행복한 것 일까.
이것도 저것도 아닌데 그저 행복하게만 보여 지는 걸까.
다른 사람 따라서 나도 행복해 하는 건가, 같이 와서 행복한 것인가, 나도 같이 오면 행복해 보일까,
여기는 온통 기쁘고 행복한 사람들 천지다.
내가 알기론 그것이 그리 쉽고 흔하게 얻어지는 것은 아닌 거 같은데 말이다.
5. 전대가 없어진 것을 놀란 마음으로 알아채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난밤 침대 시트 안에 넣은 것이 생각나고 그 안에 돈이 문제가 아니고 여권, 비행기 표등 여행의 생명줄이 다 들어있고 아줌마가 분명히 침대 정리하다 발견할 것이고 견물생심, 감춰버리면 앞날이 캄캄. 순간 당황스럽고 실망스러웠지만 금방 담대해지다.
여기는 신용의 사회 스위스, 좀 안심. 둘째 내 직관이 편하게 느껴지고 셋째 문제가 생기나 안 생기나 여기선 그냥 예정대로 열심히 하는 게 최선.

융플라호로 내려와 샤이덱 역에 내려 스위스 나이프와 바나나 2개를 사다.
여기서부터는 기차 대신 하이킹으로 내려가는데 날씨는 여전히 흐리고 산책로는 계속 내리막길이여서 별로 힘들지 않고, 주변은 나무와 수풀이 우거지지는 않고 풀도 거칠지 않고 연하며 길이도 짧다.
꽃들도 조그마한 꽃 위주로 아기자기하게 피어있다.
중간쯤 가는데 비가 한 두 방울씩 선을 보이고 멀리 먹구름이 다가와 그때부터 거의 뛰어서 하이킹 종점인 역사에 도착하니 곧 바로 소낙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하다.
10분 정도 있으니 기차가 오고 그걸 타고 그린델발트에 도착하다.
문제는 원래 예정대로 여기서 피르스트로 가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 갈 것인가, 아니면 날씨도 그런데 시내로 내려가 숙소에 있는 복대를 확인 할 것인가 잠시 고민하다.
내려가기로 하고 아래로 내려가는 기차에 탔다 다시 뛰어내려 원래 일정대로 피르스트 가는 케이블카 역사로 가다.
어차피 지금가나 나중에 가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고 또 날씨가 언제 그랬냐는 듯 해가 비친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니 상당히 멋진 전망이 형성되고, 정상에 머물러 사진 몇 장 찍으며 아래 펼쳐지는 풍요로운 스위스 전원을 감상하다.
내려가 인터라켄에 도착하니 거의 7시가 되고 자전거 빌려서 숙소까지 가볼까 하는데 주인이 없어 포기. 버스도 보이지 않고 바삐 지름길을 선택하여 간다는 것이 오히려 뺑 돌아 시간은 더 걸리고 가는 도중 한국인 식당하나 있는 거 보고 숙소에 도착하니 반갑게 주인아줌마가 맞이한다.
내 가방 찾으니 말하지 않아도 복대와 같이 챙겨주고 하루 더 숙박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니 주인도 흔쾌히 받아들여 결국 전대문제, 숙소문제가 심플하게 해소가 되어 가벼운 마음으로 방에 들어가 우선 씻고 바로 나가지 않고 휴식 겸해서 선체조로 몸을 풀어주고 잠을 삼십 분 정도 잔 후 아까 스쳐지나온 한국식당으로 찾아가다.
식당은 한국인 단체손님을 무더기로 받았는지 시끄럽고 번잡하다.
주인도 이미 단체손님을 받아 손님을 받을 수 없다고 약간 불퉁하게 말하고 어찌하다 겨우 자리 잡고 육계장 하나 시켜먹는데 국내에서도 맛보기 힘든 예술적인 맛이어 약간 황홀해하면서 음미하듯 천천히 먹다.
주인은 투박한 촌분인데 그 집 일 잘하는 아가씬 며느리 삼고 싶을 만큼 참 맑고 곱고 상냥하다.
이것저것 챙겨주는 모습이 음식 못지않게 따뜻하고 정겹다.
나올 때 육계장 값 치고는 많은 28F 내면서도 아깝지 않게 생각이 되고, 숙소에 들어와 목욕가운입고 잠을 자다.

H,E,L
1. 융플라호 전망대에서 볼펜 6F 주고, 일기 쓰는데 썩 괜찮다.
2. 엽서를 정식 우편함에다 넣지 않다. 스위스 사람 한 번 더 믿어보자.
3. 익숙하지 않는 것 그러나 보편적인 것. 즉각적으로 행한다.
4. 선택에서 간단 명료 하라.
오히려 차선을 선택하라.
담대함이 차선이 최선 되게 만들어준다.
최선에 집착하고 얽매이는 순간 결국 선택이 최선 인 것도 나중엔 차선이나 최악으로 바뀐다.
그 시점에 최선이란 없다. 나중의 결과가 최선을 만들 뿐이다. 이 역설을 잘 이해하라.
- 소음인 특유의 완벽을 바라고 선택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는 나에게 주는 충고-